중국금융 이야기/중국 채권

판다본드 급증배경 및 전망 & 계포일락(季布一諾)

아판티(阿凡提) 2016. 9. 10. 05:56

판다본드는 외국기관이 중국 역내에서 발행하 위안화 표시 채권을 말하며.  판다본드는 2005 10 국제금융공사(IFC) 아시아개발은행(ADB) 중국의 은행간 권시장에서 각각 11 3,000만위안, 10억위안의 위안화 표시 채권을 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판다본드의 발행주체와 모집자금의 사용 제한 등으로 판다본드의 발행은 저조한 흐름을 보여왔다. 2010 9 「국제개발기구의 위안화채권 발행관리 잠정방법」 개정안에서 판다본드 발행을 통해 집한 금을 해외에서 사용하도록 허용함에 따라 2015 상반기까지  4 기관이 60억위안 규모의 판다본드를 발행하  발행량이 소폭 증가하였다.

 

그 후  2015 하반기부터 판다본드의 발행량이 급증하기 시작하여 2016 1~7 27 기관이 571억위안 모를 발행하였으며, 이는 2015 발행규모의 4.8배에 달한다. 국정부도 2015 12 3년만기, 30억위안 규모의 판다본드를 발행한 바 있다.

 

판다본드의 발행주체와 모집자금의 사용 제한 해제는 판다본드의 발행 증가로 이어졌다.  2015 9 중국인민은행은 HSBC(홍콩) 중국은행(홍콩) 본토에서의 위안화 채권발행을 승인하였으며, 이는 글로벌 상업은행의 판다본드 발행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후 판다본드의 발행주체는 국제개발기구, 해외 비금융기업, 해외 상업은행, 외국지방정부, 외국 중앙은행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2016 4 중국인민은행은 판다본드 발행을 통해 모집된 금을 해당 기업의 중국  자회사에 대출을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외채한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낮은 발행금리, 환리스크 헤지, 다양한 투자자 확보, 위안화 약세 전망 등의 이유도 판다본드 발행이 증가한 유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판다본드의 발행 관련하여 제도 미비, 회계기준 불일치, 모집자금의 사용 어려움 등으로 해결해야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현재 판다본드의 발행과 관련하여 국제금융기구의 판다본드 관련 잠정제도만 발표되어 있는 반면 해외금융기관, 정부나 기업의 판다본드 발행 관련 제도는 미비하다. 한편 발행자가 모집자금을 역내 혹은 역외에서 사용하려면 승인을 받아야 는데, 중국당국은 금의 과도한 해외유출을 통제하기 때문에 해외 사용에 어려움이 있다.

 

중국당국의 자본시장 개방 의지, 위안화 국제화 추진의도는 계포일락(季布一諾: 계포가 한번 한 약속이라는 뜻으로, 약속을 반드시 지킴을 이르는 말)에 가깝다. 이를 감안할 때 중국향후 판다본드 시장에 대한 제한을 진적으로 완화하여 판다본드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IFC 향후 5년간 판다본드 시장규모가 500억달러( 3,200억위안) 이상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래 자료는 자본시장연구원에서 발표해 주었다.

 

 

* 부산출장(9/7~9일)으로 매일 자료를 올리지 못했음을 사과드립니다.

 

사기()》 〈계포전()〉에, 초()나라 사람 계포()는 젊었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해 한번 '좋다!'라고 약속한 이상에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이런 계포가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천하를 걸고 싸울 때 항우의 장수로서 출전해 몇 차례 유방을 괴롭혔는데, 항우가 패망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계포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이 걸려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고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고조() 유방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는 사면과 동시에 낭중()이라는 벼슬을 얻었고 다음의 혜제() 때에는 중랑장()에 올랐다.

그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도 의로운 일에 힘썼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흉노()의 선우()가 당시 최고권력자인 여태후()에게 깔보는 투의 편지를 조정에 보내온 일이 있었다. 이에 진노한 여태후는 흉노 징벌을 위한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먼저 상장() 번쾌()가 나서며, "저에게 10만 병력을 주십시오. 소신이 오랑캐들을 깨끗하게 쓸어 버리겠습니다"라고 큰소리쳤다. 당시는 무슨 일이나 여씨() 일문이 아니고는 꿈쩍도 못하던 때이다. 신하들은 여씨 일문의 딸을 맞아서 여태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번쾌에게 잘 보이려고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때였다. "번쾌의 목을 자르십시오" 하며 감히 나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계포였다. 계포는 "한고조()께서도 40만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가 평성()에서 그들에게 포위당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10만으로 흉노를 응징하겠다는 것은 망발()입니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오랑캐와 시비를 벌이고 있을 때 진승() 등이 그 허점을 노리고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들에게서 입은 상처는 오늘까지도 아물지 않았거늘 번쾌는 이것도 모르고 위에 아첨하기 위해 천하의 동란을 불러일으키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포의 강한 신념에 찬 목소리에 좌우신하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계포의 목숨도 이제는 끝장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후는 즉시 폐회를 명하였고 그후 다시는 흉노 징벌을 입에 담지 않았다. 여태후는 계포의 신의를 믿고 이사건을 덮어두었던 것이다.

 

 


2016.9.10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판다본드 급증배경 및 전망(160826, 자본시장연구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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