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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라이벌, 베이따(北大)와 칭화(淸華) & 국사무쌍(國士無雙)

아판티(阿凡提) 2018. 4. 21. 05:38

2005 9, 타이완(臺灣) 저명한 사상가이자 작가인 리아오(李敖) 칭화대학(淸華大學) 찾아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따칭띠궈, 베이따황(大淸帝國, 北大荒).”

 

장내의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말이 꼬집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연사도, 청중도 씁쓸함을 지울 없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사회에서 소위 실용적 학문이라고 있는 이공계가 환영받는 반면, 인문학은 갈수록 위기에 몰리는 세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은 칭화가 중국 최고의 공대라면, 베이따는 중국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대학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 근대 이후 최고의 인재를 배출해온 대학의 이러한분업 어떻게 발전해갈 것인지 하는 문제는 향후, 중국교육의 풍향계가 것이다

 

인문학적 사고를 현실과 접목하려는 베이징대학의 노력은 학교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베이징대학은 일찍부터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학제개편을 통해 광화관리학원(光華管理學院), 정부관리학원(政府管理學院) 등을 설립하고, 학술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지구화 시대 세계질서 속에서의 중국의 경제 발전, 거버넌스 시스템 구축, 대외협력과 평화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헤쳐가기 위한 연구와 도전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학적 강점을 학교 전체의 문화와 학풍으로 정착시키고, 토대 위에서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고 이끌어갈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베이징대학이 중국 인문과 사상의 심장이라면, 옆에 하나의 심장이 뛰고 있다. 베이징대학 동문을 나와 남쪽에 자리 잡은 중관촌을 등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독특한 모양의 문이 보인다. 바로 칭화대학 서문(西門)이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 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칭화대학은 시진핑(習近平), 후진타오(胡錦濤), 주룽지() ·현직 중국최고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학 출신들이 중국의 정부요직을 두루 차지하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혁명세대 정치지도자들이 은퇴하면서 중국은 본격적인테크노크라트시대가 열렸다.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과학기술이 첫째가는 생산력이다(科學技術是第一生産力)’라고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공학을 전공한 정치가들이 대거 중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상하이교통대학(上海交通大學)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뒤를 이은 후진타오와 시진핑 모두 칭화대학 공대 출신이다. 중국의 테크노크라트 시대는 가장 뛰어난 공학도를 배출해온 칭화대학의 시대였다. ‘기술인재의 요람 어느새고위관료의 요람 되었다.

 

흥미롭게도 나라마다 대학라이벌이 존재한다. 한국의 연세대와 고려대, 미국의 하버드대와 예일대, 영국의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그리고 일본의 와세다대와 게이오대가 그렇다. 이들은 상호간의 학문적 차별성과 학풍의 차이를

두고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한다. 이들의 노력이 쌓이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이 두터워지고 이를 활용할 있는 싱크탱크가 만들어진다. 중국의 베이따와 칭화 역시 상호간의 경쟁과 협업 속에서 수도 베이징을, 아니 중국 전체를 미래로 이끌고 가는 국사무쌍(國士無雙:국사(國士)는 나라의 훌륭한 선비, 곧 나라에서 둘도 없는 뛰어난 인물이란 뜻 )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위 내용을 설명하는 아래 첨부자료는 <인천대학교 중국 학술원>에서 발표해 주었다.

 

 

 

 사기()》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한()나라 명신 소하()가 한신()을 한고조 유방()에게 추천할 때, “ (한신만은 국사로서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신이 항우() 밑에서 도망쳐 멀리 유방을 찾아 한나라로 들어가 하후영()에게 인정을 받고 치속도위()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승상()인 소하를 알게 되었다. 소하유방에게 한신을 여러 번 추천하였으나 유방도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다. 이윽고 유방항우에게 밀려 후퇴하게 되자 장수와 군대들이 실망하여 속속 빠져 나갔다. 한신도 희망을 잃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소하는 미처 유방에게 말할 사이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쫓아갔다.

 

소하까지 도망쳤다는 말에 유방은 몹시 낙담하고 있는데 이틀쯤 후에 소하가 한신을 데리고 돌아오자 한편 반갑고 한편 괘씸하여, 어째서 도망을 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하는 “도망한 것이 아니오라 도망간 사람을 붙들러 갔다왔습니다.” 하며 한신을 가리켰다. 왕은 의아하여, 많은 장수가 도망을 가도 뒤쫓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한신을 데려왔느냐고 묻자, 소하는 “장수는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지만 한신만은 국사로서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며 그를 천거하였다. 이리하여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고, 마침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통일의 공을 세웠다. 

 

                                                     2018.4.21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숙명의 라이벌, 베이따(北大)와 칭화(淸華)(180202, 관행중국).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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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라이벌, 베이따(北大)와 칭화(淸華)(180202, 관행중국).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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