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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북한화교의 이야기 & 일패도지(一敗塗地)

아판티(阿凡提) 2018. 4. 28. 06:03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 늦은 . 송가량(가명)씨는 청진시 송평구역 강덕리 화교농민 송세상(가명)씨와 그의 아내 왕안미(가명)씨의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송세상(1901년생, 산동성 일조현(日照縣)출신) 1930년대 중반 산동에서 배편으로 진남포까지 넘어온 , 각지를 이동하면서 품팔이를 하다 청진시 강덕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북한에서는 1946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정책은 1947 봄부터 1948 봄까지 화교농민에게도 적용되었다. 송세상씨도 강덕리에서 농지를 분여 받아 자기 땅에서 야채농사를 시작했다. 1950 6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 4월부터 북한화교의 집단귀국이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 동북지역에 위치한 강덕리의 화교는 휴전까지 농사일을 하면서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전쟁이 끝나자 북한에서는 1955년부터 화교농민도 본격적으로 북한의 협동조합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북한정부는 농촌지역 화교농민의 농지를 도시주변의 땅으로 교환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송세상씨 일가 역시 1956년쯤 화교농민이 집중된 청진 포항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1966 북중관계가 소원해지자, 북한에서는 화교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어 중국 국적을 회복하는 동시에 귀국신청을 요구하는 화교가 급증했다. 화교학교에서는 모주석어록 학습반이 조직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 송가량씨도 학습반에 참가했다. 반원들은 청진시가 관할하는 중국인민지원군묘 찾아, 모주석어록을 읽기도 했다. 화교학생의 운동이 점차 격화되고, 조선인 교원과의 대립이 날로 심해지자, 북한정부는 화교학생에 대한 특별식량배급을 조선인 부양가족과 같은 300g으로 재조정했다. 학교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지고, 뒤이어 학교는 임시 휴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중국에서 시장경제가 확립되면서, 1985년부터 신의주화교들이 북중간의 민간무역에 참가하였고, 청진화교들도 1980년대 친척방문이나 조국 관광의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상품을 북한에 가져와 판매했다. 송가량씨가 처음으로 중국관광단에 참가한 것은 1991 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상품구매자금으로 현금 300달러와 해산물 등을 준비하였고, 중국에서 일용품, 의복 등을 수입했다. 송가량씨 일가는 점차적으로 북중 민간무역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1994 김일성 사망이후 북한의 배급제도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송가량씨는 회사에서 받는 식량표가 실제 배급소에서 사용할 없는 일패도지(一敗塗地:  한 번 싸움에 패하여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음을 비유)의 상태에 빠지자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송씨는 화교연합회에서 10년간 일했다. 현재 그는 귀국하여 연변에서 2 삶을 보내고 있다.

 

위 내용을 설명하는 아래 첨부자료는 <관행중국: 인천대>에서 발표해 주었다.

 

 

 

 사기()》 〈고조본기()〉의 말이다. 진()나라 2세 황제 원년() 가을, 진승() 등이 기현에서 봉기하였다. 진현에 이르러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장초()라 하였다. 여러 군현에서는 모두 그 지방관을 죽이고 진승에 호응하였다. 패현()의 현령도 스스로 백성을 이끌고 진승에 호응하고자 하여, 소하()와 조참()을 불러 상의하였다. 그러자 소하조참은, "진나라의 관리인 현령이 반란에 가세한다면, 자칫 백성들이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나라의 가혹한 정치와 부역을 피해 유방()을 따라 성 밖으로 도망간 백성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들의 힘을 빌면 모두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현령은 번쾌에게 유방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방이 100명 정도의 무리를 이끌고 오자, 갑자기 현령은 그들이 모반할까 두려워 의심하였다. 그래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소화와 조참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성벽을 넘어 유방에게 도망간 뒤였다. 유방은 성안의 장로들에게 천하의 정세를 설명한 글을 비단폭에 써서 화살에 매달아 쏘아 보냈다. 이에 장로들은 백성들과 함께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그에게 패현의 현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유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가 혼란하여 각지의 제후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 그만한 장수를 찾지 못한다면 한 번에 패하여 땅에 묻힐 것이다. 나는 나의 안전을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능력이 부족하여 그대들의 부형이나 자제들의 생명을 완전히 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중대한 일이다. 원컨대 다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그러나 결국 유방현령이 되었다. 그를 두고 패공이라 함은 여기서 유래하며, 이것으로 그는 한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2018.4.28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어느 북한화교의 이야기(180202, 관행중국).docx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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