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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인(溫州人) & 수어지교(水魚之交)

아판티(阿凡提) 2016. 8. 13. 05:34

중국의 유대인으로 알려진 원저우(溫州)상인이들은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 원저우중화총상회와 원저우동향회를 조직하고 연합단체인 세계원저우인연의총회(世界溫州人聯誼總會) 통해 매년 세계원저우인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존재감을 자랑한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동남 연해에 위치한 원저우시(溫州市) 인구는 800 명이다. 원저우시는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모델이 도시로 신발, 의류, 안경, 가구, 라이터, 플라스틱제품, 전자부품 등의 경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특히, 원저우시의 경제적 성공은 외국 자본의 투자나 중국 정부의 지원 없이 원저우인의 민간자본으로 견인한 것이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원저우시의 경제발전이나 원저우인의 활발한 상업활동은 원저우인의 국내외 네트워크 혹은 원저우의 생산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국내외 원저우인은 최신의 시장정보를 원저우에 가지고 와서 새로운 상품을 개발·제조하여 원저우인의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판매한다. 그리고 원저우인은 이주지에서 벌어들인 상업자본을 다시 원저우의 산업자본에 투자하여 지역의 경제발전을 견인한다.

 

원저우인의 국내외 네트워크에서 동향회 조직은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원저우인은 돈을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진출하여 원저우촌을 형성한다. 원저우촌은 수백 명에서 수만 단위로 존재한다. 원저우인은 가족과 저축 이외에 동향회 조직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원조우인이 암스테르담에서 성공하면 고향에서 자식, 친척을 불러들인다. 다음으로 원저우 화상은 기타 유럽의 지역에서 알게 원저우인을 암스테르담으로 불러들여 공짜 밥을 반년 제공하고 도움을 , 창업하도록 도와준다. 이때 중요한 것이 커뮤니티 캐피털(Community capital)이다. 성공한 원저우인 동향 사업가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내어 창업 자금을 빌려주고 창업한 원저우인은 사업을 통해 돈으로 갚아간다. 이렇게 수년이 지나면 창업한 원저우인이 암스테르담에서 증가하게 되고, 그곳에 원저우촌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 흥미로운 점은 원저우인은 철저한 분업체제 속에서 사업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교는 모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곳에 이주해 원저우인은 화학섬유, 면직물과 같은 보완적인 장사를 할뿐 모직물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그래서 공업단지의 97% 원저우인이 차지하고 있다하더라도 지역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는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근교의 창고구(倉庫區) 현지인의 상가 운영으로 거의 망해갈 위기에 처했다. 원저우인이 그곳에 속속 이주하여 수백 단위의 투자를 하면서 창고구는 훌륭한 도매상가로 거듭났다. 더욱이 원저우인이 점포를 다른 원저우인에게 대여하자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바이어가 쇄도했다. 창고구의 어느 상가거리는 모든 종류의 구두를 갖추고 있으며, 이웃한 상가거리는 가격대가 다양한 신사복, 어린이복, 부인복의 판매장이 즐비한 매력적인 상가거리로 탈바꿈했다.

 

원저우인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僑鄕인 원저우, 중국 국내의 이주지, 해외 이주지의 3극을 중심으로 거미집처럼 상호 연결되어 있다. 바로 중국 고사의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매우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일컬음)를 연상케 한다. 원저우인의 강한 동향의식과 동향회 조직이 개혁개방 이후에 처음 형성된 것은 아니다. 청대와 근대시기 중국 국내외에 원저우인의 동향회 조직이 활발한 활동을 해왔고, 그러한 관행이 개혁개방 이후에 다시 부활한 것으로 해석할 있다. 아래 자료는 인천대학교에서 발표해 주었다.

 

 

 

 이 말은 중국 삼국시대의 유비()와 제갈 량()의 사이를 비유한 데서 비롯된다.

《삼국지》 <제갈량전()>을 보면, 유비와 제갈 량과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친밀하여지는 것을 관우()와 장비()가 불평하자, 유비가 그들을 불러 “나에게 공명()이 있다는 것은 고기가 물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는 불평을 하지 말도록 하게( )”라고 타일렀다. 이리하여 관우장비는 다시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6.8.13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인(溫州人)(160801, 인천대학교).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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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인(溫州人)(160801, 인천대학교).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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