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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웨이하이 & 암중모색(暗中摸索)

아판티(阿凡提) 2016. 10. 4. 05:19

한국인들에게 산둥성은 특별한 무엇이 있는 같다. 어린 시절 입가에 한가득 검은 흔적을 남기며 맛있게 먹던 짜장면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투자하고 진출한 지역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산둥성은 친근하다. 지도상에서 산둥성은 한국과 마주보며 주거니 받거니 마치 역사의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형상이다. 위도나 기후도 한국과 비슷하고 눈에 들어오는 풍광도 왠지 낯설지 않다. 그중 예전에는 무심했지만 최근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친구 같은 도시 웨이하이에 주목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웨이하이는 이미 우리 역사의 부분에서 필연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신라인 장보고가 웨이하이의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신라인의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갔던 장보고는 807년에 무녕군(武寧軍) 입대하여 무녕군 소장(小將) 되었다. 장보고는 무녕군을 떠나 적산을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했고, 824년에는 법화원 세워 신라인의 구심점이 되었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한중일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여 해신(海神)으로 불렸던 것은 그가 신라로 돌아온 후의 일이었다.

 

한국이 웨이하이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해서 한국은 웨이하이에게 더없이 중요한 국가이다 하나의 증거가 중국 최초의 한국식 테마 상업관광단지인 한러방(韓樂房) 건립이다. 우리나라에 차이나타운이 있듯이 한러방은 웨이하이에 조성된 코리아타운이다. 여기에는 한국상업거리, 여수문, 경회루, 낙천문화광장, 야시장, 각종 한국문화 테마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한러방은 한국의 여수시와 웨이하이시 간의 합작품으로, 상징이 여수문은 2012 여수시가 기와 2만장을 지원하면서 건립되었다. 기와 하나 하나에는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 도안이 새겨져 있고, 여수문 현판은 김충석 여수시 시장이 친필로 것이다.

 

이곳 한국식 먹자골목에는 불고기, 비빔밥, 떡볶이 가게가 즐비하고, 곳곳에 한국식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상품 교역전시장도 갖추고 있어 한국의 일용품과 식품도 전시 판매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코리아타운이 한국인들이 하나 모여살기 시작하고 한국 상점과 음식점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면, 한눈에 봐도 한러방은 한국인들이 많이 와서 코리아타운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조성한 웨이하이시의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그럴까, 아직은 어설프고, 아직은 한국인들보다 중국인들로 북적인다.

 

이렇듯 웨이하이에게 한국은 특별하다. 웨이하이는 산동성의 끝부분에 위치하여 한국과는 가깝지만 중국 내에서는 역사적으로 변방을 면치 못했던 곳이다. 문화의 전파도 늦었고 문명의 혜택도 별로 받지 못한 곳이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웨이하이가 선택할 있는 새로운 돌파구는 동북 아니면 한반도였다. 그러한 지정학적인 위치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웨이하이의 산업구조를 살펴보면 농수산업, 관광업 이외에는 이렇다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현재의 돌파구는 바로 한중 FTA이고, 한국이며 인천이다. 이것이 웨이하이의 한국에 대한 적극성의 원동력이다.

 

상하이나 광저우 같은 동부 연안의 물류항구에 비해 편벽된 위치에 있는 웨이하이가 한중 FTA를 활용 중국 내에서 한국상품과 중국상품의 성공적인 물류 집산지가 있는지를 암중모색(暗中摸索: 어떤일을 닥쳐 한 편으로는 대응하며, 한편으로는 몰래 더 좋은 방법을 도모)하고 있다.  그 성공 여부는 두고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웨이하이가 한국과 더욱 가까운 도시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고, 한국과의 교역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 한국의 사드배치 결정으로 중국정부가 한류 콘텐츠에 대한 제한을 시작하고, 공공연히 한국과의 공식적인 교류를 보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웨이하이의 이러한 희망도 보류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모처럼 웨이하이가 추진하고 있는 야심찬 계획과 양국의 평화로운 교류가 걸림돌로 막히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래 자료는 인천대학교 학술연구원에서 발표해 주었다. 

 

 

 《수가화()》에 나오는 말이다. 나라 때 허경종()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후에 재상까지 역임한 인물이었으나 건망증이 심하여 사람을 여러 번 만나도 그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의 건망증을 꼬집어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오?" 이 말에 허경종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들과 같은 사람들의 얼굴이야 기억하기 어렵지만, 하손()·유효작(심약() 같은 문단의 대가들을 만난다면 어둠 속에서라도 더듬어 찾아 기억할 수 있소()."

이 고사에서 유래되어 '어림짐작으로 무엇을 찾거나 알아낸다.'는 뜻으로 쓰이며,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무엇을 알아내려 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2016.10.4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한국을 사랑한 웨이하이(160901, 인천대학술연구).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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