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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뇌물관행을 보며 김영란법을 생각한다 &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아판티(阿凡提) 2017. 4. 27. 05:39

 

선물을 보내는 사람은 지방관, 친인척, 지인 들이었다. 지방관은 관찰사, 병사, 첨사, 수령 등을 말하는데, 이들이 보낸 선물이 절반 이상이었다. 지방관들이 보낸 선물은 규모도 상당하고 종류도 다양했던 반면,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보낸 선물은 단순한 예물인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들은 선물을 자신의 자산으로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청의 자금으로 구입하거나 향리에게 조달하라고 지시했다. 때문에 이러한 선물을 받더라도 유희춘은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체로 흔쾌히 받았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당시의 관료 중심 사회에서 이러한 선물이 상례적이었고 비용처리에서도 공사 구분이 애매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물자를 선물로 요구하기도 할 정도로 선물 관행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235)

 

정병석의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중에서(시공사)

 

 

지난해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었던 김영란법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전히 경제위축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제도 완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최순실 사태와 탄핵국면으로 인해 현장에서는 이미 흐지부지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접대와 선물(뇌물)에 무감각했던 우리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이번 기회를 그대로 놓쳐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접대와 선물, 뇌물의 문제는 최근의 일만이 아닌가봅니다. 오래된, 그래서 우리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더 큰 문제입니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책을 보니, 조선시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더군요.

 

조선은 중앙 정부의 관료들에게도 녹봉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거나 정해진 양보다 적게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국가의 기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조차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녹봉만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던 관료들은 불편을 견디고 감수하거나 개혁에 나서야했을텐데, 기대와는 반대로 부정부패 등 다른 생활방도를 찾아나섰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에 선물 형식의 금품을 받는 관행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 창피했던 현실은 조선 관료로 상세한 일기를 남긴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이문건의 '묵재일기'에 잘 나타나있었습니다. 유희춘은 10년간 총 2,855회의 선물을 받았다고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무려 월 평균 42회에 달합니다. 주로 지방 관리나 동료 관리, 제자, 지인들에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의 종류가 곡물, 면포, 어패류, 약재 등 다양하고 양도 많아 선물만으로 생활을 영위할 정도였고, 남은 것들을 재산 증식에 쓰기도 했다고 하지요.

 

더 큰 문제는 이런 선물을 주는 지방 관리들이 자신의 돈으로 사서 주는 것도 아니고, 관청의 자금으로 선물을 구입했다는 것입니다.

"유희춘의 경우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어야 하는 경우에 인근의 지방관에게 부탁해 선물을 대신 보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관들이 제공하는 선물, 특히 다른 관료들에게 보내는 선물을 지방 관청의 재원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이 조선 관직 사회의 보편적인 관행으로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어 관료들이 선물 부탁에 부담을 가지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의 접대와 선물, 뇌물 관행은 이런 조선시대의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생각보다 그 뿌리가 오래되었고 깊습니다. 이는 이런 관행을 통해 편하게 살아온 계층들의 불만이 클 것이고, 그들이 '단견'으로, 또는 고의로 부작용 핑계를 대며 저항할 것이기에, 고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과거' 모습이야말로 김영란법이라는 이번 개혁의 기회를 절대 놓쳐버려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옛부터 민초에게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뜻)라고 합니다. 만약 이번 기회도 놓쳐버린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위 내용은 <예병일의 경제노트>에서 빌어 온 것입니다.

 

 

 

예기()》의 <단궁하편()>에 나오는 “가정맹어호야()”에서 유래되었다.

가정이란 혹독한 정치를 말하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미치는 해는 백수()의 왕이라 할 만큼 사납고 무서운 범의 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혼란 상태에 환멸을 느끼고 제나라로 가던 중 허술한 세 개의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여인을 만났다. 사연을 물은 즉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가 "그렇다면 이 곳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여인은 "여기서 사는 것이 차라리 괜찮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그나마도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공자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로다." 하였다. 

 

 * 아판티는 베이징 출장(4/27~28일)을 다녀온 후 다시 뵐께요^^

 

                                         2017.4.27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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