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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의 역주행 & 관포지교(管鮑之交)

아판티(阿凡提) 2017. 5. 23. 05:27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중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관계로 이어왔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2015 9월에 있었던 중국의 전승절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연말에 있었던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타결과 사드는 그 간의 한중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중일관계에서 한국과 보조를 맞추었던 중국으로서는 전광석화처럼 위안부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을 보고 난감했을 것이다. 특히 하얼빈 역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개관했고, 이외에도 중국 여러 곳에 흩어진 임시정부 등의 시설을 허용하는 조치를 통해 대일관계에서 한국과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이런 신뢰가 무너졌다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한국의 입장에서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한중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할 시점이다. 

 

 

우선 한국과 중국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어떤 기업에서 특정한 사건이 발생해서 그것이 악화되는데 3개월, 그리고 회복되는데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중국에서 기업을 꾸리고 있는 경영자들은 1년이나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단 기업뿐만은 아닐 것이다. 중국은 당 국가 체제라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며, 중앙과 지방이라는 점도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둘째 장기적으로 중국 전문가의 양성과 활용이 정부와 민간이 화학적 결합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중국과 여러 일을 추진하다보면 왜 한국은 매번 사람이 바뀌냐고 말한다. 우리도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라오펑요(
老朋友·오래된 진짜 친구)'를 육성해야 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 이후 특사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보냈다. 그는 올해 94세로, 중국과 약 60여 년의 인연을 맺고 있다. 2011년 중국 '시나닷컴'에 게재된 한 기사에서는 1949년부터 2010년까지 중국 <인민일보>에 실린 기사를 중심으로 '중국인민의 라오펑요(
国人民的老朋友)'를 선정했다

기사는 여기에 123개국의 601명이 해당된다고 밝혔다. 이 중 한국은 단 2명으로, (
) 김대중 대통령이 여기에 포함된다. 국가별로 따져보면 일본은 111, 미국 55, 영국 24, 프랑스 23, 독일 18명 등이다. 중일 간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슬기롭게 풀리는 것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라오펑요들이 국가적 이익을 도모하는데 노력하기 때문이다.

셋째, 국가성장 과정에서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절차와 과정'을 보다 지혜롭게 안착시키고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한중관계가 역주행의 가속페달을 밟은 것은 지난해 황교안 국무총리가 사드배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한미 간에 전격적으로 배치결 정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높아진 갈등의 봉우리에 비가 내리고, 골짜기에 물이 흘러, 수목들이 하나씩 둘씩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자연의 이치대로 한중관계의 역주행을 정지시켜야 한다. 그리고 중국과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의 관계를 되살려
공통의 목표를 함께 설정하며, 단계적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관계 회복해 나서기를 새 정부에 기대해 본다.  

 

위 내용을 설명하는 아래 첨부자료는 원광대에서 발표해 주었다.

 

 

 

 춘추시대 제()나라에 관중과 포숙이라는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나라는 폭군 양공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지요. 결국 공자 규는 관중과 함께 노나라로 망명했고, 규의 동생인 소백은 포숙과 함께 거나라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양공이 권력 쟁탈전 끝에 살해되고 나라는 혼란이 계속되어 군주의 자리가 비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두 공자는 서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죠. 이에 규는 관중을 보내 귀국길에 오른 소백을 암살하고 느긋하게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소백은 천만다행()으로 관중이 쏜 화살이 허리띠에 맞아 목숨을 구했고 부랴부랴 귀국해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결국 소백에게 잡힌 규는 자결하였고 관중은 사형 집행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때 포숙이 나서서 소백에게 말하죠.


“전하,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신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를 등용하십시오.”
결국 관중은 자신이 죽이려던 자 휘하에서 재상이 되었고, 이후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은 소백은 제 환공에 올라 춘추5패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관중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몫을 더 크게 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 흐름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내게 늙으신 어머니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생아자() 부모(), 지아자() 포숙아야()).”

음, 관포지교보다 더 유명한 말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가 바로 여기서 나왔군요.

 

 

2017.5.23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한중관계의 역주행(170509, 원광대).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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