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판티 이야기/그리운 유학시절

뒤돌아 본 나의 중국 유학

아판티(阿凡提) 2011. 3. 1. 08:59

  1993년1월, 우리 일행을 실은 서울발 중국행 비행기는 서해를 건너 천진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에 석탄냄새 자욱한 현지의 첫인상, 공항을 지키고 서있는 중국 공안들의 누더기같은 복장은 사회주의(1992년 8월 한중간 국교는 수립되었지만 중국은 여전히 적성국으로 분류되어 서울 남산 밑에서 반나절 교육을 받아야 출국이 가능하던 시절임)라는 낯선 용어와 겹치면서 나에게 묘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경행 직항편이 없어 천진공항에 내려 리무진(말만 리무진이지 당시 우리의 시골버스 수준)을 타고 북경으로 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리무진은 2시간 남짓 달려 북경의 '베이징위엔셰웬(北京語言學院)'도착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베이징위엔다쉐(北京語言大學)'의 前身으로, 외국인 학생에게 중국언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던 그런 곳이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북경으로 온 나는 당연히 이곳에서 공부를 하여야 하지만 나의 직장 기업은행에서  유학을 담당하던 직원은 "은행돈으로 유학을 가면서 어떻게 '~학원(學院)'으로 가냐고 일반대학으로 가야지"하면서 중국의 최대 명문 북경대학으로 나를 보내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온 우리 일행(유학알선업체에서 모집한 수강생, 당시는 중국에서 인정해 준 유일한 알선업체임)15명 중 절반은 이곳에서 내리고 나머지는 북경대학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아하~, 이제 알았다. 우리 회사만 '~학원'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구나"하는 사실을......  어학을 배우면서 무슨 명문대학을 찾아, 우리의 일류병은 그렇게 끈질겼다.  

 

  중국어를 배우는 어학연수생으로의 생할은 그렇게 해서 북경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의 나이 38세(2003-1955),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도 있었으니 그게 그렇게 흉은 아니었다. 항상 주위를 의식하던 직장생활에서 풀려난 그 기분은 마치 마굿간에 같혀 있던 말이 초원으로 뛰쳐나와 마음껏 달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1년의 어학연수 기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것은 당연한 일. 귀국을 앞둔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어학연수만으로 유학생활을 마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아니 딱딱한 직장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두렸웠는지도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은행에서 승인해 주던 말던 석사시험을 치르고 돌아가자."

 

  수소문끝에 금융전공이 개설되어 있는 중국인민대학을 찾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된지 얼마 되지 않아 북경대학에는 금융전공이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학교재정이 넉넉치 못했던 당시 대학들로서는 외국유학생을 꽤나 환영하는 편이었다. 즉 학생이 甲의 입장에 있었으므로 어렵지않게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은행으로 복직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인사담당 임원을 찾아가 중국으로의 석사과정 유학을 보내주길 부탁드렸다. 유학자체는 찬성하면서도 왜 하필이면 유학가는 곳이 중국이냐며 극구 반대하던 그 분은 나의 계속된 부탁에 결국 승인을 해주셨다.

 

  가족과 함께한 중국의 유학생활은 나에게 잊지 못할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아들과 딸이 다닐 초등학교를 수소문하던일, 강의 내용을 이해 못해 수업시간이면 교실의 맨 앞줄에 앉아 교수님의 눈만 빤히 쳐다보던 일, 방학이면 가족이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나던 일, 결코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유학생활 3년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갔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일까? 귀국을 앞둔 1997년 초, 나는 결국 박사시험에 응시하면서 나 자신 인생의 주사위를 던지고 만다. 당시만 해도 박사 코스는 은행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귀국 후 터진 1997년 말의 아시아 외환위기는 나로 하여금 박사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1999년, 나는 결국 은행과 담판을 하게 된다. 중국에서 박사공부를 할 예정이니 내가 제출한 휴직원을 받아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 두겠다는 배수진을 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내게 투자한 돈이 적지 않았던 은행은 나의 의견을 참작하여 중국 천진지점으로 발령을 내주었다. 

 

  외국에 근무를 하는 직원은 학교에 진학을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발령을 내 준 것은  나에 대한 일종의 배려이기도 했다. 평일에는 천진지점에서 근무를, 주말이면 북경으로 건너와 지도교수로 부터 특강을 받는 나의 박사시절은 은행에서 학비를 지원해주면서 공부에만 전념케 하던 석사시절의  그런 달콤함이 아니었다. 

 

  38살에 시작한 어학연수 과정에서 47살에 끝난 박사과정까지의 중국 유학생활은 이러한 과정을 겪어왔다. 지금까지의 글이 중국 유학시절의 큰 물줄기를 설명드렸다면, 앞으로는 작은 물줄기를 한 구비씩 흘러 내려 가고자 한다. 

 

2011.3.1일

아판티(이창영)와 함께하는중국금융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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