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판티 이야기/그리운 유학시절

이화원에서 보낸 나의 유학시절

아판티(阿凡提) 2011. 3. 20. 13:59

아래 글은 아판티가 출신 고등학교 교지(백양)에 기고한 것입니다. 기업은행 중국 청도지점장 재직 시 유학시절을 회상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중국 북경의 이화원(颐和园)은 아름답다.

유유히 떠가는 유람선이 아름답고, 인공으로 만든 산위에 자리잡은 여름별장이 아름답다. 호수의 서쪽으로 난 한적한 길은 관광객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유학시절 자주 거닐던 한적한 길로서 물가의 버드나무며 인공섬에 드리운 그림같은 부교(浮橋)들이 특히 아름답다. 청일전쟁 당시 서태후가 군함제작비를 유용하여 이 휴양지를 만드는 바람에 일본에게 패한 가슴 아픈 역사를 알기나 하는지 끊임없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나는 우리나라의 강남 8학군에 해당하는 북경의 중관촌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이 지역에는 북경대학, 청화대학, 내가 다니던 중국인민대학 등 중국을 대표하는 유명대학들이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내가 왜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은행에 근무하는 대다수 직원들이 영어를 공부하여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이다.

 

1989년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3개월간의 국제금융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동양인을 멸시하는 듯한 미국인이 싫었고 밤만 되면 안전문제로 신경을 써야하는 미국이 싫었다.(내가 묵었던 숙소가 LA근처의 흑인밀집지역이었음)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영어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도저히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좌절감이 나로 하여금 중국어를 공부하게끔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중국에 있던 지난 10여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급변기의 10년 이었음을 감안할 때 내가 보고 배운 중국생활은 정체되어 있는 중국이 아니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역동적인 중국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북경의 유학생활 중 방학만 되면 가족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동북지방의 조선족자치주에서부터 서부의 우루무치까지, 남부의 운남성에서 부터 북부의 내몽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방방곡곡을 여행한 것은 우리 가족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오랜 외국생활은 모국에 대하여만 애국심을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해당국에 대한 애정도 가져온다고 했던가? 우리 가족도 어느새 중국을 좋아하는 ‘중국파’가 되어 버렸다.

자주 씻지 않는 중국 사람들, 여름이면 웃통을 훌렁 벗고 더위를 식히는 남자들, 길거리에서 남자에게 고함을 지르고 뺨을 때리는 중국 여자들, 초대받은 중국 교수 집에서 부인은 앉아 있는데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만드는 남자 교수 등등, 어느 것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은 유교를 우리에게 전해 준 중국이 이를 내팽겨 버린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중국이고 알 수 없는 사람이 그 곳에 사는 중국인이다.

 

과연 중국인은 누구인가?

중국인은 한마디로 대륙적이다.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서 우리와 사뭇 다른 점이 많다. 여유만만하고 스케일이 큰 특징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을 의심하고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또한 의외로 축소 지향적인 측면도 엿보인다.

중국 사람을 두고 흔히 "만만디"라고 부른다. 행동이 느리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하면 먼저 느리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여유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넓다.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의 약 44배나 되는 땅이다. 넓은 땅에 살다 보니 자연히 국민성도 영향을 받게 되어 서두르지 않는다. 또 서둘러서 될 일도 없다. 중국에서도 쓰촨성(四川省)의 나뭇꾼은 여유만만하기로 유명하다. 나무를 팔아 살아가는데 우리의 옛날처럼 오전에 나무를 하여 오후에 장에 나가 파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서 양자강을 타고 상해로 내려가면서 판다. 무려 5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에 나서는 것이다. 한 반 년쯤 나무를 해서 뗏목을 만들며 아예 뗏목위에다 집을 짓고 채소까지 심는다. 그 뿐인가? 닭과 오리도 몇 마리 싣는데 그것이 병아리를 까고, 그 병아리가 다시 병아리를 깐다. 이때가 되면 뗏목도 얼마 남지 않고 닭만 잔뜩 불어나 있다. 상하이에 도착하면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한 번의 장정에 3년은 족히 걸린다. 쓰촨의 나뭇꾼이 서두를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그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서두르기도 한다. 그때 쓰는 말이 "마상(馬上)"이다. 우리말로 즉시이기는 하지만 그 어원을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옛날에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 말이었다. "마상"은 지금 출발하기 위해 말 안장 위에 앉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또 얼마나 빨리 달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상"은 우리처럼 성질 급한 사람이 보기에는 한참 뒤쯤이 된다.

 

귀국 후 내가 느낀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과 중국인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 가운데 자만은 금기중의 금기로 볼 수 있다. 10년 전에 비하여 많이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중국과 중국기업에 대해 한국인, 한국기업은 아직도 자만하고 있다."는 경계의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1974年 3月 고등학교를 마치고 企業銀行에 입행 후 나는 약 20년이 지난 1993년부터 중국 북경에서 어학연수를 시작으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귀었던 동창생들은 공산당 간부급으로서 현재 중국 정부・금융기관(재경부, 중국인민은행,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국유은행, 상업은행, 자산관리공사, 증권회사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자산은 유학생활을 통하여 사귀게 된 이 중국 친구들이라 생각한다. 39살 에 석사과정을 시작했을 정도도 늦깍이 공부를 한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동창들은 나보다 10살 정도 어렸으며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본 생활비로 빠듯한 생활을 한 반면, 은행의 지원으로 유학을 간 나는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있었기에) 틈 만나면 누추한 그들의 숙소로 찾아가 그들에게 종종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담소하곤 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고마웠나 보다. 지금도 정기적인 모임을 통하여 상호간의 우정을 돈독히 해 나가고 있다.

 

내가 공부한 전공부문은 중국금융(은행, 증권, 보험)영역으로 10년 동안의 학문연구와 현지에서의 은행 근무를 통하여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청도지점장 근무시절에 중국해양대학 경제학원의 겸임교수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외국어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국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강의는 매주 2시간 이었는데 강의 할 때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특히 강의시간이 남았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어로 강의 할 때는 시간이 남을 경우 시사문제나 농담으로 시간을 떼울 수 있지만 외국어 강의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강의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숭실대학교에서 대학원 야간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금년 3월 “중국증권시장의 이해”라는 책을 발간하게 된 것은 국내 증권사에서 본격적으로 중국 주식거래가 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펀드를 판매하는 직원들 조차도 중국시장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수준의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혹시 중국증권시장에 관심 있는 동문들은 ‘구글’에서 “중국증권시장의 이해”를 검색하면 간단한 책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지난 중국생활 중 중국 청도에서의 “백양61회 청도모임”이라고 하겠다. 비록 인원수는 3명(김차병:한일합섬 청도법인장, 이정평: 중소기업책임자)밖에 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동문을 만나는 것도 반가운데 동기들을 2명이나 만났으니 국내에만 계시는 동문들은 감히 그 기쁨을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우리는 틈만 나면 골프장에서 운동도 하고 식사자리 술자리도 하면서 외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나의 이러한 경험이 앞으로 중국에 이미 진출하였거나 진출계획이 있는 동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지 벌써 몇 년이 흘렀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합니다. <중국금융 산책>가족들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어 즐겁고 보람찬 나날 되길 기도 드립니다.

 

2010.3.20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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