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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무역역조는 언제 시작됐고 왜 굳어졌나 & 와신상담(臥薪嘗膽)

아판티(阿凡提) 2019. 8. 27. 05:00

1965 국교정상화와 수입절차 간소화로 적자 1 달러 돌파

1967 민간차관 확대로 전체 수입에서 일본 비중 40% 달해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하면서 부품·소재 일본의존 본격화

1990년대 이후 국산화개발 나섰지만 핵심부품 등은 계속 수입

최근 10 누적된 대일 적자 한화로 3073653 규모


해방 이후 일본과의 민간무역이 시작된 것은 1947 8 15 미군정 시절이다. 당시 한국은 수출할 물품은 없었고 국내에 필요한 물자는 많았으므로 당연히 수입초과였다. 이후 한국은 번도 대일 무역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최근 10 동안 누적 대일 무역적자는 2607 달러에 달했다. 7 16 환율로 한화 3073653 원에 달하는 규모다. 수출로 달러를 일본에 바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출이 늘어날수록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많이 해야 하는 무역구조는 싫든 좋든 일본을 이롭게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일본이 부품·소재 등의 대한국 수출을 규제하면 한국의 수출, 나아가 국가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술개발 등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밖에 없다.



글로벌 체인으로 이뤄진 국제분업 무역구조에서 필요한 물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에서처럼 지나치게 높은 의존은 상대국에게 약점을 노출하고 언제든지멱살을 잡힐위험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와신상담(臥薪嘗膽:가시 많은 거친 나무 위에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먹는다는 뜻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어 심신을 단련함을 비유 )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위 내용을 설명하는 아래 첨부자료는 <무역협회>에서 발표해 주었다.





사기()』의 「세가()」와 『십팔사략()』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인접한 ()나라와 월()나라는 앙숙지간이었다. BC 496년, 오나라 왕인 합려()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갔는데 월나라 왕 구천()에게 크게 패하고 전투에서 월나라 장군 영고부()에게 화살을 맞았다. 그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죽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아버지의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가시 많은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자신의 방을 드나드는 신하에게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부차야! 너는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使: “, ”) 부차는 복수를 맹세하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구천은 부차의 이러한 복수심을 알고 먼저 공격을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크게 패하여 회계산()에서 포위당했고 결국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하였다. 부차가 용서해 준 덕분에 구천은 오나라에게 점령당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스스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며 지난 치욕을 상기했다.


항상 쓸개를 곁에 매달아 두고 앉아서나 누워서나 쳐다보고 올려다보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 (, , , , , . : “?”) 회계의 치욕을 잊지 않았던 구천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쳐들어갔고 이십여 년 만에 오나라 도읍을 점령하고 부차를 굴복시켰다. 부차를 사로잡아 귀양을 보냈으나 그가 깨끗이 자결함으로써 구천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실패를 맛보거나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굳은 의지를 의미한다. 마지막까지 목표를 향해 힘든 순간을 견뎌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로 많이 사용된다.




2019.8.27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대일 무역역조는 언제 시작됐고 왜 굳어졌나(190724, 무역협회).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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