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熊&기타국 이해하기/기타국가

동아시아에서 희망의 연대는 가능할까? & 막역지우(莫逆之友)

아판티(阿凡提) 2019. 10. 25. 05:11

19세기말, 현대일본의 지폐에도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국가목표였던 탈아입구(脫亞入歐)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일본:필자)-(중략)-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하며, 중국과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한 사정을 두지 말고 바로 서양인들이 그들 나라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해야 한다. 나쁜 친구와 친한 자는 함께 오명을 면할 없다. 나는 진심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는 바이다.

 


그러나 1919년의 한국의 기미 독립선언에서는 일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중략)-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믿을 없다고 비난하는 아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중략)-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


20여년 사이의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일제 강점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원망보다는 보편적 가치와 자존이 핵심적 주제가 되었다. 일본의 멸시 대상이었던 한국에서 오히려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현재의 // 3 관계에서도 일본의 아베정권이 취하는 행동을 보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부정적 유산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나 거리의 증오연설들이 제도권 정치가들에 의해 반복되고, 오히려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논의 구조 안에서 막역지우(莫逆之友: 서로 거스르지 않는 친구라는 뜻으로, 아무 허물없이 친한 친구)의 화해가 가능할까.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강제하는 현실 속에서 피해자들은 어디에서 안식을 찾을 있을까.

위 내용을 설명하는 아래 첨부자료는 <관행중국>에서 발표해 주었다.




장자()》 내편() 대종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내용의 우화가 나온다. 이 우화는 둘 다 바깥의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천리()를 좇아 마음을 비우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으로, 그 도입부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도 물론 가공 인물이다.

‘어느 날 자사()·자여(輿)·자려() ·자래() 네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능히 없는 것으로써 머리를 삼고, 삶으로써 척추를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겠는가. 누가 생사존망()이 일체임을 알겠는가. 내 이런 사람과 벗이 되리라.” 네 사람이 서로 보며 웃고 마음에 거슬리는 게 없어서 마침내 서로 벗이 되었다( ).’ 그 뒤로 이들이 병이 들고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초연한 모습이 이어진다. 


2019.10.25일

<아판티와 함께하는 중국금융 산책>


동아시아에서 희망의 연대는 가능할까(190901, 관행중국).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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